江湖中的“侠客”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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个引申义。
“一是指隐士隐居的场所。
隐士指隐居江湖的人,他们并不与正统的社会秩序截然对立,故称不上纯粹的江湖人。
二是指一种飘忽不定、浪迹四方的生活状态。
今天所谓‘江湖’的含义,通常都是指的这一点。
如若用‘江湖’流动的、湍急的、神秘莫测的水比喻动荡的生活,二者相似之处有三个方面:一是江河湖海遍布神州大地,江湖中人闯荡江湖就是走江过湖、四处漂泊,像水一样时时流动;二是江湖深浅莫测,比喻出外谋生吉凶难卜,充满艰险;三是江湖中人尝尽辛酸,饱经风霜,正如江河穿山过滩,千回百折,有久经锻炼、阅历丰富的含义。
”
江湖的产生、演变与中国社会进程是同步的。
每当社会动荡,战乱频仍,灾荒连年,民不聊生,大量人口背井离乡,流入市井,步入江湖。
作为个体的江湖人,其力量弱小,生存能力单薄。
因此,他们便以某种方式组织起来,形成江湖团体。
诚如《水浒传》中各种各样的江湖人为除暴安良、伸张正义而集结起来反抗朝廷。
这种由江湖人、江湖团体发展至江湖社会、江湖文化的过程是自然而然的。
可以说,江湖文化产生的土壤是传统农业社会,其发展演变都离不开这一层背景。
江湖是与正统社会相对的一个社会。
这个社会不一定有完全统一的组织形式、固定的法律规范,但它有形形色色的人物、五花八门的团体、相对稳定的规矩和道义原则,它们共同构成了江湖这一充满神秘色彩的奇异世界。
词引申为一个具有文化内容的概念。
而后古龙在他的一本武侠小说中借杀手燕十三之口说道:“人在江湖,身不由己”,更成为惊世之言。
至此,江湖的称谓为更多的人接受,也有了更深更广的内涵。
最终,还是古龙为江湖的称谓做了总结:有人的地方,就是江湖。
江湖,而非溪海,正因为溪水不能容纳更多,给人的感觉更是潺潺细水、清澈见底;海,又失之巨大,猛烈而骇人,心中只有敬畏,感觉望而却步。
只有江湖,才能真正表现意境,江有溪之隽永绵长,且有奔渤之势,复杂的水境泥沙混杂;湖,另有海之深沉,无穷的生命蕴涵之中。
江湖在流变
从历史上来看,江湖现象最早出现在社会急剧变革而动荡的春秋战国时期,在新旧秩序、制度的转型过程中,众多文人武士怀着各种才能和技艺闯荡江湖、周游列国,如孔子、苏秦、毛遂、蔺相如等文人,以及曹沫、专诸、豫让、聂政、荆轲等侠客。
在汉以前,不管是行侠仗义之士,还是鸡鸣狗盗之徒,大都形单影只,独闯江湖,在历史上留下的是其个人的活动和事迹,而未形成江湖团体、江湖社会。
最早的江湖团体当属产生于东汉末年的“五斗米道”和“太平道”——它们是后世“三教九流”中之道教的原始形态。
从那以后,江湖团体层出不穷,江湖中人滋生蔓延,及至近世,无时不有,无处不在。
专门从事中国古典文学研究的专家认为,“江湖”在其演变中产生了两
江湖,是以中国为代表的东方传统文化的一部分。
和仁义、忠勇、孝悌等社会普遍称颂的传统文化元素相比,江湖文化千百年来难登大雅之堂。
但因为江湖文化以侠义为中心,所以在民间得以大行其道,以江湖为核心的文化成果俯拾皆是。
在中国众多武侠小说和电影中,我们可以看到一个感性的江湖:在深夜的街头独自挥舞着刻有自己名字的剑,像风一样潇洒;看着自己的师友至爱喋血黄沙,为报仇也只能十年面壁。
在这里,你可以和爱侣双剑合璧,共奏一曲“笑傲江湖”;也可以凭借自己的绝顶聪明,找寻传说中的秘籍,练就绝世武功;或者开山收徒,成为受人景仰的宗师……
然而,究竟什么才是江湖?江湖在哪里?
何谓江湖?
江湖的称谓最早是由庄子提出的,出自《庄子·大宗师篇》,原句为“泉涸,鱼双与予处于陆,相濡以沫,不如相忘于江湖”。
“江湖”本意指长江和洞庭湖,后泛指三江五湖,即自然界所有的江河湖海,但从春秋以后,“江湖”一词逐渐抽象化,成为中国传统文化中的一个特殊名词。
《史记·货殖列传》记载,范蠡在帮助越王勾践成就一番事业后,急流勇退,“乃乘扁舟浮于江湖”,此处的江湖既有江、湖本义,也含有范蠡主动退隐之意。
《南史》所云“遁迹江湖”、杜牧的“落魄江湖”,则是不容于官场、被迫在社会上
混迹之意。
如此,江湖已从自然地理名
2013년 7월 12일, 메이위(美域)연극단이 제작한 대형 톈진(天津)무협코미디시
트콤<웨라이객잔(悦来客栈)v2.0> 은 톈진화하극장에서 공연되었다.
2013年7月12日,由美域话剧团呈现的大型津门武侠爆笑舞台剧《悦来客栈v2.0》亮相华夏剧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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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 남에게 부끄럽지 않는” 협객(俠客)의 정신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집중 취재金桥视点
1950년대는 중국의 문화 분야에서 무협소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무렵으로 무협문화가 전반적으로 풍미하였다. 곽정(郭靖), 장무기(張無忌), 영호충(令狐冲), 원승지(袁承志), 진근남(陳近南), 진가락(陳家洛) 등 중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무협인물들은 모두 무협소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절대무공을 지닌 고수들로 나온다. 무협소설가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어필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닦은 절세 무공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원한과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정이지엔(郑伊健)이 출연한 곽원갑.
郑伊健饰演的霍元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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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무협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섬광처럼 빛나는 강자에 맞서 약자를 돕는 의로운 의협 정신이다.
‘협(俠)’이란 단어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정의를 지키며 소탈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무쇠골격의 사나이, 치욕을 참아가며 힘든 일도 거뜬하게 이루어내고 난세에도 굳은 혈기로 똘똘 뭉쳐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기개와 절개를 지닌 호남아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무협소설 대가 진융(金庸)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 간에 의리가 있으며, 사랑에 정조를 지켜야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협객(俠客)의 정신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진정한‘협’의 정신을 지닌 인물에는 어떤 이들이 있을까?
폭도들을 진압해 백성의 안위를 보장하고, 약한 자를 도와주고 강한 자에게 대항하다
‘협(俠)’에 관한 묘사는 <한비자(韓非子)>와 <사기(史記)>에 최초로 나타나지만,‘협’의 본질적 의미나 구체적인 사상은 묵자(墨子)로 거슬러 올라간다.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으로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이다. 묵자는 평민계층 출신이지만,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여 상류층 통치계급의 사상에 해박했을 뿐만 아니라, 기층 민중의 고통과 애환도 잘 알았다.
묵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란이 그치지 않는 혼란한 시대였다. 묵자는 이런 사회현상에 직면해‘겸애(兼愛)’와‘비공(非攻)’등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묵자는 협(俠)의 행위방식은 협을 행하고, 의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여겨 폭도를 진압해 백성을 편안히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자신의 힘만 믿고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시강능약(恃强凌弱)’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묵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옮겨 자신의 주장을 제후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묵자는 강대한 초(楚)나라가 약한 송(宋)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꼬박 열흘 밤낮을 짚으로 삼은 신을 신고 걸어서 초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묵자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묵자는 송나라 사람이 아닌 노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노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송나라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이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묵자의 의협 정신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묵자와 그의 제자들의‘죽음에 이를지라도 발길을 돌려 후퇴하지 않는’정신을 높이 칭송하였다.
신의를 지키고, 은혜에 보답하다
주나라 시대의 천자와 제후, 봉건영주들에게는 그들의 군사전문가가 있었다. 당시 군대의 중추는 세습 무사로 구성되었는데, 주나라 후기에 통치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이들 무사들은 작위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유협(遊俠)’으로 불리었다. <사기(史記)>에서는‘유협’을 일컬어‘말은 신용이 있어야 하고, 행위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키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타인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야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신의를 지키고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이 의협 정신의 중요한 근원이 된 것이다.
춘추시대 말기, 진(晋)나라의 협객 예양(豫讓)이 그 대표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예양은 자신을 존중하고 중용(重用)해 준 지백(智伯)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선비(士)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나는 지백의 복수를 갚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공언하였다. 예양은 지백의 적인 조양자(趙囊子)를 암살하기 위해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가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첫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예양은 자신의 얼굴을 흉측하게 망가뜨리고 거지가 되어 시장을 떠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예양은 조양자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에 매복해 암살을 시도했으나 또 다시 실패로 끝나자, 비록 조양자의 목을 베지 못했으나 옷이라도 베어 복수의 의미로 삼고 싶다며 조양자에게 옷을 벗어 달라고 부탁한다. 조양자가 옷을 벗어 던지자, 예양은 비호처럼 몸을 솟구치며 칼을 휘둘러 지백의 복수를 갚았다. 예양은 넝마조각으로 변한 옷을 펼쳐 놓고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드디어 지백의 은혜에 보답했노라”며 크게 울부짖고는 자결하고 말았다.
타인을 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의리를 중시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경시하다
서한(西漢) 초기의 통치자들은 자연에 순응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는 무위(無为)의 통치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지키고 살아가도록 함으로써 협객 계층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나라 시대의 협객이 이전 시대의 유협과 다른 점은 이미 정치적, 경제적 실력을 지닌 평민 협객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명예와 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타인을 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의리를 중시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경시하며 의협의 절개를 중시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곽해(郭解)는 의협 집안 출신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평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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